아파트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어머니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신 서울 토박이신데,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외가를 찾아갈 때, 가끔 어머니께서는 예전 이 동네의 여기쯤에 무슨 밭이 있었고 저쪽 어디쯤에는 이러이러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말씀하시며 가리킨 곳에는 모두 여지없이 아파트가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8차선 대로는 자동차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한 옛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서 내 머리속에서는 거의 SF적인 고고학적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나서부터 아파트에서 자라났고, 아파트 이외의 집에서 산 기억이 없다. 어릴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친구들도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엇다. 조금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사귄다 해도 기껏 다른 '단지'에 사는 정도였다. 일년에 한 두번 갈까말까한 시골에서나 아파트와는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영향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지금은 부모님도 주변 일가 친척도 모두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옛날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 윗 세대만 하더라도 모두 아파트 이외의 집에서 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우리는 어쩌면 집이라고는 아파트밖에 모르는 최초의 세대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산 한옥마을에만 가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불과 한 세대 차이로 우리는 아파트 이외의 주거 공간을 상상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아파트 공화국'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서울의) 아파트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사람들은 땅이 좁고 사람은 많은 나라의 특성상 대규모의 아파트 건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프랑스인인 저자가 분석한 한국의 현실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조금 다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실패한 아파트라는 주거양식이 한국에서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초창기 기피되었던 아파트가 정부의 적극 지원을 통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윽고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 공간으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많은 아파트가 지어져야 했을까?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에 다른 대안은 존재할 수 없었던 걸까? 많은 의문이 제기되지만, 저자의 판단은 조심스럽다.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 단지가 된 달동네의 인구 밀도가 달동네이던 시절보다 더 줄었다는 통계와, 평수가 넓은 아파트일수록 작은 평수의 아파트와 비교해 세대당 가족 수가 더욱 적다는 통계는 수많은 아파트 건설이 누구를 위해 이루어졌는지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아파트 단지 건설은 기존 거주민을 외부로 밀어내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주민(중산층 이상)이 들어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서울 외곽으로, 수도권으로, 그리고 다시 새로 생기는 신도시로.

 아파트는 그 자체로 현대적이고 서구적이 것이 아니다. 미국인의 대부분은 정원이 딸린 개인주택에서 생활하고,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에서 아파트 단지는 그다지 선호되는 거주 양식이 아니다. 프랑스의 대단지 정책은 이민자 유입과 폭동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저자는 한국의 아파트는 모든 낡은 것 - 옛날 것 - 과 결별하여 근대화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던 국가 정책과 부합하는 주거 양식으로, 역시 같은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국민들에게 수용되어 아파트 자체가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설명한다. 한옥은 그와 대비되어 이제 버려야할 낡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아파트 생활 양식을 면멸히 분석해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위 '낡고 살기 불편하다'는 한옥의 주거 양식이 아파트에 변형되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한옥 생활의 불편함으로 지적되었던 신발 신고벗기, 식사 때마다 상 옮기기 등이 그런 예로 활용된다. 아파트는 단순한 집이 아닌 일종의 근대화의 상징 같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아파트가 상징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긴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집 마련을 꿈꾸고, 그리고 우리가 마련하기를 꿈꾸는 그 집은 예외없이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이제 가장 편리한 형태의 주거 양식이자 그 자체가 재산 증식을 위한 재테크의 수단이 된다. 집을 가진 것과 아닌것이 천지차이라는 게 그런 연유로 나오는 것일까.

 이제와서 아파트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없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에는 저마다의 발전 방식이 있으며 이제 서울이란 도시에서 아파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지금까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아파트에 대해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적잖은 의문 또한 갖게 되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던 가치가 뒤집어지는 느낌이,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재미가 생각보다 크다.

 저자가 조심스레 분석하는 아파트 도시 서울의 미래는 현재 진행중이다. 초기 건설되었던 많은 아파트의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70년대 이후 건설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의 수명이 다해감에 따라, 서울 모든 지역에서는 재개발에 대한 욕구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는 뉴타운 사업계획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의 대규모 건설로 인해 서울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변화하였지만, 그 아파트들이 모두 재개발되면 도시는 다시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함께 고민해야 문제라 본다.

 --
 ..영내에서 썼던 마지막 후기.
by nigh2 | 2008/07/27 01:40 | 감상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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